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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의 자존심 농구선수 야오밍, 중국에서 인생 2막 시작
    라이프 2017. 3. 12. 23:00


     229cm 큰 키로 중국 농구 협회(Chinese Basketball Association) 우승을 했던 야오밍. 그는 중국인 최초로 NBA에 진출하여 2002년부터 2011년까지 중국을 대표하는 선수로 미국 프로농구에서 열심히 뛰었습니다. 매년 NBA 올스타 경기에도 출전했지만, 후반부에는 부상으로 고생도 했죠.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과 새로운 출발에 대해서 함께 알아보겠습니다.



    ■ 최고의 농구 선수 야오밍


     야오밍은 18살에 국가대표팀에 선출되었고 CBA 팀(상하이 샤크스)에서 활동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죠. 그는 활약 덕분에 CBA 결승전 MVP도 받았고요.



     22살에 미국으로 간 그는 NBA 드래프트에서 1순위로 휴스턴 로케츠에 지명되었죠. 드레프트 역사상 미국의 대학 팀 출신이 아닌 선수로서 첫 국제적 선수였습니다. 




     언어 장벽, 동서양 문화 차이, 청각장애 등 야오밍이 극복해야할 점들은 많았습니다. 농구 관계자분들과 NBA 팬들도 처음부터 그를 신뢰하지는 않았죠. 하지만, 야오밍은 자신의 실력을 믿지 않는 겸손한 노력파였습니다. 모난 성격이 많은 NBA 선수들과 달리 불평하지 않고 연습에 충실했죠. 



     NBA에 진출한 2002-2003시즌부터 2010-2011시즌까지 휴스턴 한 팀에서만 활동했죠. 그는 꾸준한 노력과 뛰어난 실력으로 NBA에서도 인정받는 선수가 되었어요. NBA 올스타에도 뽑힐 만큼 팬들의 인기도 끌었고, 팀 승리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죠. 결국 미국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도 했답니다. 



     휴스턴 로키츠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그의 등번호 11번을 영구결번하기로 결정하죠. 이번 영구결번은 클라이드 드렉슬러(22번), 캘빈 머피(23번), 모지스 말론(24번), 하킴 올라주원(34번), 루디 톰자노비치(45번), 캐롤 다우슨(전 단장)에 이어 7번째로 팀 영구결번으로 지정된 것입니다. 




    ■ 세계적인 선수가 된 야오밍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린하오와 함께 중국 선수단의 기수를 맡았습니다. 세계적 농구 스타 야오밍이 기수로 등장하면서 베이징 올림픽은 더욱 빛이 났죠. 비록 올림픽에서 메달을 못 땃지만, 아시안 게임과 아이안 선수권 대회에서 농구 금메달의 주역 역할을 했지요. 



     야오밍은 모범적인 사생활과 불평을 않고 꾸준히 노력하는 모습 덕분에 좋은 이미지를 계속 쌓아 갈 수있었어요. 덕분에 광고도 많이 찍고, 스포츠 외교 측면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스포츠 스타가 되었지요. 그가 NBA 선수로 인기를 끌면서 미국내에서 중국인에 대한 좋은 인상을 심어 주는 계기가 되었죠. 



     은퇴 후에는 각종 공익사업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습니다. 아프리카에 가서 코뿔소 뿔 보호와 관련된 광고도 많이 찍고, 뜻 깊은 행사에 초대 될때마다 거액의 기부도 자주 하고 있죠. 



    ■ 중국 농구협회 회장에 선출된 야오밍 


      중국인들의 스포츠 롤모델이자 국제적으로 유명해진 야오밍이 이제 중국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어요. 바로 중국 농구협회 회장으로 당선된것입니다. 그는 최근에 세계 대회에서 성적 부진한 중국 농구를 새롭게 바꿀 것이라고 공헌하였습니다. 중국 대표팀 감독도 직접 맡을 것으로 애기도 나오고 있어요. 



     그는 대표팀에게 더 좋은 훈련과 시합환경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미래 사업에도 주력할 예정입니다. 미래의 중국 대표 선수들이 어릴때 부터 체계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다양한 지원 프로그램을 계획 중입니다. 



     중국내에서 존경과 기대를 받는 것은 야오밍. 전문적인 능력과 늘 겸손한 태도 때문에 중국 농구협회 회장이 되었지만, 그의 어깨는 무겁습니다.  NBA 에서 10여년 동안 활동 했던 그의 선진적인 국제경험이 중국내에서 빛을 발휘할 것이라 기대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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